□ 문학평론
매너리즘에 헌신하는 모조품들
李 晩 宰
문학은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문학의 재료자체가, 곧 개성이다. 개인의 특수한 정신내용 자체가 말로 변한 것이다. 그러기에 개성을 표현의 목적물로 삼을 때, 언어는 필연적으로 의존되는 수단이다. 작품을 이루고 있는 말, 그 자체가 역사의 소산이며 역사와 더불어 변천하며 인간의 역사적 체험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한 작품은 역사의 한 순간에 완결된 하나의 <말 덩어리>인 셈이다. 이 말 덩어리는 작가의 어떠한 사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말의 관습(문법, 어휘 등)에 따라 해석되고 올바로 평가되어야 한다. 작품의 해석과 평가는 언제나 작품자체의 모든 부분들이 실질적으로 연결되어 나타내는 전체적인 의미에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문학은 과학 및 철학의 명제적 진술과 대조되는 별개의 의미체계를 구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인간의 체험은 지극히 역동적이며 복합적이고 자가당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순수한 도덕적 명제를 제시하기보다, 인간의 체험처럼 애매하고 역설적이고 아이러니가 넘치며 역동적이며 동시에 기적적으로 한 덩어리로 뭉쳐 있는 글이다. 또한 인생이라는 복잡한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기 위한 방법을 구현하는 것이다.
문예사조에서 '퇴폐(退廢, decadence)'란 문학의 황금시대가 지나고 난 뒤에 새로운 방향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 조화와 균형을 잃고 방향감각마저 상실해 무력감에 빠져 생기는 현상이다. 문학의 일면적인 효과를 과장되게 추구하든가 또는 독자를 자극하기 위한 감각적, 선정적 수법을 사용하여 문학의 질이 전반적으로 저하될 뿐 아니라, 기괴하고 병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및 영국의 일단의 문인들은 퇴폐파(decadent)였다. 프랑스의 보들레르나 고티에 등은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보다 난숙기를 지나 시들려고 하는 꽃, 싱싱한 풋과일보다 익어서 저절로 떨어지는 과일을 좋아하는, 병적인 취미를 가졌었다고 할 수 있다. 심리구조에서 그들은 자연적인 것보다 비자연적이고 인위적인 사실에 대한 취미, 또 그러한 취미를 만족시킬 사물에의 탐닉, 과민한 자의식, 인간의 타락상과 병적인 기질에 대한 문학적 흥미, 예술을 위한 예술의 강조, 현실에 대한 반감, 기괴한 병적인 주제를 강조했다. 그러므로 특수한 형식과 기교를 강조한 균형 잡히지 않은 작품의 해학, 전통적인 수사법, 문법논리의 파괴, 음악성, 또는 회화성의 일면적 강조, 난해성의 의식적 조장, 사회는 물론 자신에 대한 아이러니 또는 냉소 등등의 특징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퇴폐파로 자처했던 프랑스의 많은 문인들은 그 후 상징주의를 발전시켜 문학적 표현의 한 방법을 창안하여 세계문학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유미주의(唯美主義, aestheticism), 즉 예술은 그 스스로를 위하여 있는 것이므로 도덕적, 정치적, 기타 비예술적 표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다는 것이 근본 입장이었다. 이 사상의 철학적 배경은 바로 독일관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해관계, 실용성, 의지의 속박은 모두 인간의 현실에 속한 것으로서 인간정신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비약을 저해하는 요소들로 보았던 것이다. 유미주의는 예술의 존엄성을 신봉하는 엄숙한 문학 예술가들을 한쪽에 포용하기도 하였으나 보다 일반적으로는 퇴폐적 양상을 띠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좁은 의미의 유미주의는 주로 퇴폐주의와 동의어로 이해되기까지 한다.
우리나라의 현대문학 초기에는 이러한 서구 세기말 문학의 모방에서 태동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창적인 노력도 없이 그저 그냥 서구 문학의 모방이었기에 퇴폐파를 자처하는 양 보이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우리문학은 여태까지 문학의 황금시대를 접해 본 경험도 없고, 그렇다고 문학의 시들어가는 듯한 분위기도 없었으므로 우리 신문학의 퇴폐주의는 어디에서도 그 뿌리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아직도 혼미하고 어수선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또렷한 문예사조도 없이 안주하려 하는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매너리즘에 헌신하는 모조품들이…….
19세기에 이상주의와 관념론이 대두하면서 문학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외부사실에 대한 묘사적, 명제적(命題的) 의미보다 훨씬 긍정적인 실재를 가까이 포착하는 것은 시인의 정신 자체라고 하였다. 시적 정신은 상상력, 즉 이성을 훨씬 능가하는 능력으로,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실재에 도달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문학의 의미는 이성으로 확증할 수 있는 <저급한>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궁극적인 상상적 진리를 그대로 구현한다. 이 문학사상은 우주의 단일한 정신이 세상 모든 사물에 침투되어 있어서, 우수한 정신의 소유자[예술가]는 한 가지 사물에서 우주정신을 직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문학이 과학과는 다른 각도에서 인간경험에 대한 객관적 의미를 구현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과학과 철학은 궁극적으로 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인위적으로 순수화한 결과인 셈이다. 그것은 물론 인간이 어떤 중요한 목적을 위하여 이룩한 의미의 세계임에 틀림없으나, 인간경험 자체를 다 말하지 못할뿐더러, 그것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도 아닌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
다소 진부한 설명이지만, 문학은 말의 일종이며, 말은 의미(meaning)의 표현, 전달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그 의미는 넓게는 기호이론(theory of signs, semiotic), 좁게는 의미론(semantic)이 발전하면서 문학이 어떤 의미를 구현, 전달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생겼다. 문학의 의미에 대한 관심은 독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해석의 문제를 크게 대두시키고 있다. 문학의 글, 즉 문학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그 의미가 직선적이거나 평면적이라기보다는 입체적 내지 고차원적이라는 견해가 대두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언어의 내연(內延, denotation)적 의미와 외연(外延, connotation)적 의미로 구별하게 된다. 그리고 문학은 내연이다.
문학의 장르는 문학적 관습(慣習, convention)이 오래 계속하여 사용 또는 응용한 결과로 인하여 고정된 관습처럼 되어버린 형식, 문체, 주제, 소재 등을 뜻한다. 노래가사가 시가 될 수 없듯이, 시는 운문(verse)으로 되어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운문이 시가 된다는 주장은 온당치 않다. 애초에 생물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이 운문을 만들기 때문에 포에타[만드는 사람]가 아니라 부분들을 가지고 전체를 얽어 짜는 까닭에, 즉 플롯을 만드는 까닭에 시인이라고 하였다. 과연 그가 말한 바대로, 운문은 전체를 지향하는 부분들을 얽어 짜는 데에 가장 적절한 언어적 방법의 하나인 까닭에 시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과연 단정할 수 있을까. 여기에 재고가 필요하다. 현대 서정시의 리듬은 외형적 율격에 의하여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시적 표현의 욕구에 의하여 자연 발생한 것이라 하여 내재율이라고 한다. 시는 정보제공이 목적이 아닌 글, 내용과 형식을 분리할 수 없도록 된 글, 외연적, 기호적 언어사용이 아니라, 함축적이고 정서 유발적인 글, 그 자체로서 충족된 하나의 의미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글, 하나의 통일된 심상, 나아가서는 상징이 되어있는 글이 바로 시라고 정의를 내린다. 문화가 그러하듯이 문학적 관습은 역사의 산물이다. 문학 외적 및 내적 요인들로 인하여 문학적 관습들은 서서히 변모하고 생성, 소멸, 대치 부활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시에 있어 행과 연 갈음 같은 형식이 언제까지 속박된 관습에 자리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한번쯤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수필은 앉은 자리에서 단번에 기꺼이 읽어낼 수 있을 만한 길이의 산문으로서, 주제도 다양하고 형식도 일정한 문학 장르이다. 수필이 수필구실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그 글을 통하여 작자의 독특한 성격, 다시 말해, 문제를 보는 독특한 시각, 자신만이 알고 있는 어떤 일화, 그런 독특한 체험, 독특한 말솜씨가 표출되어야 한다. 그래서 수필은 문학장르 중에서도 가장 자잘하고 호방하고 자유 분망하다고 하겠다. 어쩌면 관습마저 벗어 던진 글이므로 작자의 독특한 성격에서 독자는, 글의 내용보다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근한 벗을 만난 느낌을 갖게 한다. 소설은 형식적 요소가 적은 장르이다. 대체로 소설은 개별적인 독자가 가장 사사로운 시간에 읽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은 그 전개방식이나 서술형태보다 전달되는 이야기 줄거리와 사상과 내용이 성패의 가름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소설을 일컬어 무기교, 무형식의 문학이라는 통설도 크게 잘못된 말이 아닌 듯하다.
오랜 세월 관습에 익숙해진 문학은, 그 장르가 세분화되었다. 이것이 어떤 면에서는 작자나 독자에게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자칫하다 보면 작자는 독창성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고, 독자는 신선함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오로지 관습에만 의존한 작품에서 독자가 느끼는 것은 인위성 내지 조작감이다. 지레 식상할 것이다. 감정이입(感情移入, empathy)이 아니라, 반감을 가지게 하는 척도가 되지 않을까. 공감(共感)의 능력이 없으면 독서할 수 없다. 공감은 다분히 지적이고 사상적인 것인 반면에, 감정이입은 육체적이고 본능적이다. 작품의 전달에 있어 감정이입이나 공감은 필수이다. 그래서 감정이입에 역점을 두는 작가는 암시성이 강한 말을 골라 구체적이고 세밀한 묘사에 치중할 것이고 공감에 역점을 두는 작가는 인간 본연의 성격을 부각시키려 할 것이다.
문학은 관습에 속박을 당하면서 그 속박을 거부한다. 언어와 의식의 흐름이나 그 작품이 매양 틀에 박힌 매너리즘(mannerism)에 젖어 있다면, 그의 필력이 거의 소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작품의 형식이든 내용이든 문학에서의 매너리즘<틀에 박힘>은 불치병과 흡사하다. 한 작가의 독특한 글투[文體]를 작품의 소재나 주제에 관계없이 늘 과다하게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기교나 글투는 소재나 주제에 따라 적절히 변하여야만 신선감을 줄 수 있는데, 무슨 불변의 법칙처럼 특수한 글투와 기교를 아무렇게나 습관처럼 사용하는 것은 단조로움을 뛰어넘어 독자를 우롱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런 저급한 문인이 우리 주변에 생각보다 적지 않다는데 부끄러움마저 든다. 이는 작가 자신이나 독자에게 불성실한 태도로 간주하여야 한다. 매너리즘은 작가의 능력 또는 성실성의 부족에서 오는 일종의 타락일 수도 있다.
얼마 전까지 필자는 월간 및 계간 순수문예지에서 편집책임[主幹]을 맡으면서, 생각보다 많은 문인들이 이러한 매너리즘에 빠져 타락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솔직히 말해 퍽 서글픈 일이다. 거개가 개정된 문법은커녕 맞춤법도 모르는 문인들이 적지 않다는 점에 이상한 분노를 느끼면서 개탄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이 문인행세를 하고 있는 현실. 이는 이미 타락한 등단지들의 산물이자 문단의 오염인 것이다. 함량미달인 사람들을 문인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극도의 비극은 극도의 희극과 일치한다. 설령 자신의 장르에 대한 해박한 문학적 이론이 다소 부실하다고 해도 작품에 성실성이 있다면 다소나마 상쇄될까. 이도저도 아닌 어정잡이.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문학은 오로지 글이다. 조신하게 문학수업은커녕 문단이나 잡지사[문예지]의 문턱이 닳도록 다니다가 소위 문학상(사실 엉터리 문학상이 판친다.)을 받는가 하면, 한없이 부끄러운 졸작을 마치 걸작인양 착각한 나머지 여기저기 남발하는, 자기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이비 문인들이 문단을 더럽히고 있지 않는가.
문학은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다. 문학은 쉬운 글이라기보다 깊은 뜻을 담고 있는 힘든 글이다. 차라리 난해성(obseurity), 독자의 문학 해독력의 부족을 느끼게 한다면 낯 뜨겁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푸념타령. 지극히 평범한 산문을 행과 연으로 갈라놓고 시라고 자랑하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직도 늦지 않았다.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미완의 습작을 그침 없이 내보이지 말고, 우선 자중 자애하여야 한다. 문인은 많지만 문학 작품은 드물다. 글을 재료로 사용하여 예술을 하는 문인이라면 자신의 분신인 글에 대한 깊은 배려가 있어야만 하지 않을까. 이른 새벽에 정안수를 떠놓고 오로지 한 마음으로 소원을 비는 그런 정성으로, 창작에 공을 들려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문단의 장래가 마치 암장처럼 무겁게 느껴 실로 안타깝다.
일본의 의사이며 문학가, 모리 오가이(森鷗外, 1862-1922)의 번역 작품<파우스트>는 명역(名譯)이라고 정평이 났었다. 그런 그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오역(誤譯)된 부분을 지적받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오역한 것에 대해 노력과 힘이 부족했던 것을 시인한다. 그렇다면 그만큼 내가 보다 더 공들였어야 했고, 보다 시간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오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문인다운 솔직담백한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하는 일에 과오가 없을 수 없다. 오류가 없는 완벽한 책이란 거의 없다. 그러나 그 오류를 없애려는 노력하는 작가에게는 기쁨과 놀라움을 느낄 것이다. 어느 문학가는 그의 저서『문학입문』 속에서 우수한 문학이란 톨스토이의 사고(思考)를 따라야 하며, 참신함, 성실함, 명쾌함 등 세 가지 조건을 들고 있다. 지금까지 그것을 느껴보지 못했는데 문득 희한한 일로 비쳐지는 것 같은 신선함, 작품의 소재(素材)에 자신의 인생 전부를 투구해서 쓰는 작가의 성실함, 그리고 표현이 자연스럽게 가슴에 와 닿는 것 등등에서 독자는 그 작품에서 상당한 가치를 공유하게 된다. 한 마디로 삶에의 한없이 넓고 깊은 인터레스트(interest), 즉 흥미, 관심, 이해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더러 행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도 더러 고통스럽고 지루한 생활에 지친 사람에게도 현실과는 다른 삶을 살려고 하는 기대와 용기를 줄 것이다. 이는 작가 한 사람이 글로써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원동력이 되지 않는다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줄의 문장이나 한 글자라도 소홀히 지나쳐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는 흔히 원고의 집필을 마친 것을 ‘탈고(脫稿)’라고 하며, 시작(詩作)하는 도중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치는데, 이를 ‘퇴고(堆敲)’라고 한다. ‘퇴고’는 일반명사이면서 고사성어(故事成語)이다.
진부한 이야기를 되풀이하자면,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 : 780?-843,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뛰어남)가 장안(長安)으로 나귀를 타고 과거를 보러갈 때, 문득 옛날을 회상하다가 시상(詩想)이 떠올랐다.(그는 중이였다가 환속했음.)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에서 두드린다(敲)보다 민다(堆)고 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혼자 곰곰이 생각하며 가던 도중, 귀인(貴人)의 행차와 부딪히고 말았다. 그 행차는 공교롭게도 경조윤(京兆尹) 한유(韓愈)였다. 행차를 방해한 혐의로 한유 앞으로 끌려나온 그는 사실대로 말했다. 한유는 한참 생각하다가 ‘민다는 퇴(堆)보다는 두드린다는 고(稿)가 좋겠다.’하며 나란히 행차를 계속했다. 그 후 두 사람은 문학적인 벗이 되었다고 한다.
문학에서 말하는 심상(心像, image)은 어떤 객관적 상관물[사물]을 감각적으로 정신 속에 재상시키도록 자극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감각적 체험과 관계가 있는 일체의 낱말은 모두 심상이 될 수 있다. 추상명사나 보통명사, 감각적 지각을 암시하는 형용사 또는 부사로 수식된 명사와 동사는 심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 편의 글 속에서 그 말이 심상의 구실을 하도록 쓰여 졌을 때, 독자가 그것을 심상으로 파악하고, 그 글의 전체적 의미를 보다 충실히 알 수 있게 되어 있을 때, 그것은 진정한 심상이 된다. 그리고 심상으로 실현되기 위하여서는 적절한 문맥에 들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된 까닭일까. 요즘의 작품 중에서는 그 심상마저 찾기 어려운 난해성을 접하게 되니, 혼돈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문학의 혼돈 못지않게, 시대적 혼돈의 비극 속에 살고 있다.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당리당략과 정쟁에 매달려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고 있지 않는가. 나라가 어려운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여야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완승완패의 패권주의를 놀리는 것같이 보이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여야가 산적한 민생문제는 접어두고 서로를 극도로 불신하고 있는 상황이니 한심하다. 만나서는 상생(相生)을 말하고 돌아서서는 상극(相剋)으로 가는 오늘의 정치 속에 우리는 노예처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가. 대북정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입을 열면 상투적인 ‘친애하는 영도자.......’로 시작되는 말투에서 북한 인민의 속박의 실상, 또는 북한체제 하에서의 인간성 왜곡의 실상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대북 경협사업에서 얻을 것보다 되레 줄 것이 많다. 자칫하다보면 북한의 밑 빠진 독은 남한의 경제적 기력마저 쇠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하여야 된다. 진정한 평화공존과 민족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북한의 실질적 조치와 체제의 동질성 회복이 필요하다. 비전향 장기수를 북한에 보내면서 약속된 이산가족면회소 설치문제는 별 진전이 없다.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 것은 인도주의 문제여서 상호주의를 배제한다지만, 북한도 남한이 요구하는 호응해야만 한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전쟁터에서 포로가 된 전쟁포로의 송환은 북한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북한이 아직도 덜 개방적인 상대로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변화 없는 남북관계 개선은 통일은 물론이고 평화공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남북한 간의 문학교류는 더욱 묘연하다. 문학사(文學史, literary history)란 흔히 ‘그 문학에 나타난 한 민족의 정신의 흐름을 기술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문학사를 일컬어 <정신의 박물관>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남북한을 통틀어 우리의 문학사도 과연 그러한 정신이 살아 있는가. 첨예하게 대립된 이데올로기로 뒤죽박죽이 된 현실이 아닌가. 현대 구조주의 이론에 의하면 사회의 여러 제도들은 다 각기 저마다의 자율적 규칙을 가지고 있지만 심층적으로는 모두 단일구조의 산물이다. 문학은 두 말할 나위없고 과학, 정치, 교육, 종교, 예술 등 일체가 서로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 선후관계나 인과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대적 감각이나 요청마저 거부해 온 것이 분단이후 북한이었다. 북한에서 요구되는 공산주의 인간(共産主義 人間)은, 소위 마르크스, 레닌주의사상으로 무장하여 그 세계관을 기초로 자기 사상과 생활을 통일한 인간으로서 당 전체주의적 지배에 의해 개조된 인간(註 : 당이 생각하는 대로 말하며,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며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희생할 줄 아는 인간)을 강요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문학 자체는 물론 북한 작가들에게서 자율적 규칙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철저하게 개조된 인간이 아니고선 문인으로서 처신할 수 없으며, 설혹 문인이라고 한들 그들은 당을 위한 선전선동의 앞잡이일 뿐 결코 문인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인간박제와 다름없을 것이다.
미학(美學, aesthetics), 즉 예술에 있어 미적 경험은 어떠한 직접적인 목적의식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적 경험은 조화와 통일성의 경험이라기보다는 감정이입의 경험이라는 독일 철학자 롯체의 의견도 있다. 후에 립스가 발전시킨 이 의견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어떤 특정한 정서를 우리 속으로 무의식중에 흘러 넣어 준다는 것이며, 이 감정유입의 경험이 강렬하고도 일관되면 그 작품은 좋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도 정서의 감염 정도를 예술작품의 가치의 척도로 삼았다. 이렇듯이 미학은 감각적 지각인 그 정서에 근저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공산주의 미학(共産主義 美學)은 그 근원부터 잘못되어 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아름다운 것, 비극적인 것, 희극적인 것에 대한 공산주의적인 견해와 평가에 의한 학설은 다음과 같다. ①아름다운 것에 대한 공산주의 미학의 견해와 평가……공산주의 혁명(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에 헌신하는 행위를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보며, 그에 반대하는 일체의 행위를 추악한 것으로 본다. ②비극적인 것에 대한 공산주의 미학의 견해와 평가……사회주의 공산주의 혁명과 건설에 헌신하다가 그 성취를 완전히 보지 못하고 죽거나 신병 또는 기타 사정으로 투쟁 대열(鬪爭隊列)에서 떠나는 현상을 뜻한다. 개인이 부모와 사별하는 슬픔이나 개인이 품은 희망이 단절되어 느끼는 슬픔은 이 범주에 넣지 않는다. ③희극적인 것에 대한 공산주의 미학의 견해와 평가…공산주의 사회 이외의 사회제도에 대한 풍자(諷刺)나 그 사회제도가 낳고 있는 고질에 대한 풍자대상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미학은 결코 미학이 아닌, 정치적 구실에 불과하며 완전한 허구인 것이다. 이른바 그들이 말하는 ‘당문학(黨文學)’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당문학이란 문학이 반드시 당의 이익과 목표에 부합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말은 1905년 레닌의 저서<당조직과 출판물>에 씌어졌음.)
그들이 주장하는 공산주의적 문예작품은 ‘문학, 예술의 당성(黨性), 계급성(階級性), 인민성(人民性) 원칙의 관철을 위한 선전, 선동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①경제건설의 결정적 원동력은 자금이나 기계가 아니라, 근로자들의 무한한 충성심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②당에 대한 충성심만 있으면 아무리 힘겨운 일이라도 그것이 당의 명령일 경우, 비록 물이나 불 속에라도 뛰어들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형상화시켜 야만이 공산주의적 문학 예술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의 문학 예술작품[사실 문학과 관계가 없지만]에서 개인의 개성이나 정서나 창의를 바탕으로 된 인간의 근원적인 삶의 가치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노릇일 것이다. 한 결 같이 그 내용은 공산주의 선전으로 일관되어, 북한의 공산독재, 세습독재를 합리화 내지 정당화하여 그들의 목적을 관철하는 상투적인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북한의 문인(?)은 당을 선전하는 꼭두각시 홍보원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들은 1952년 6월 4일 이른바 정령으로 제정된, 예술 즉 우수한 작품[당문학]을 창작하고 소위 조선 로동당 예술 사업에 공을 세운 자에게 ‘공훈예술가(功勳藝術家)’라는 영웅 칭호를 부여하였고, 1961년 7월 27일 역시 정령으로 제정된, 북한의 문학, 예술, 미술, 작곡, 무용, 방송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공을 세운 자에게 ‘인민예술가(人民藝術家)’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칭호는 공훈예술가 칭호보다 높은 영예 칭호인 것이다. 그리고 ‘공훈문학인(功勳文學人)’이라 하여, 문학부문에서 북한 당을 위해 공을 세워 이른바 공훈 칭호를 받은 문학인을 가리킨다. 그뿐만 아니다. 작가들에게 공산주의 문학[당문학] 창작에 헌신을 강요하면서 치켜세우는 데 즐겨 쓰는 상투적인 술어가 바로 ‘문필전사(文筆戰士)’인 것이다. 예컨대, 작가들은 자랑이라도 하듯이, ‘우리는 수령의 문필전사로 일하는 것을 더없는 영광으로 최대의 행복으로 여기고 있다.’하니 얼마나 잘 길들여진 꼭두각시임을 자처하는 것인가. 만약 남북 문학교류를 한다면, 고전을 제외하고 북한의 현대문학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심각한 괴리에 빠지게 된다.
북한의 문학평론은 소설, 시, 희곡, 아동문학, 번역문학 등이 북한 로동당이 내세운 문예정책에 철저히 입각하여 전개하도록 유도하거나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문학평론 활동의 원칙은 무엇보다도 먼저 당적(黨的)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당의 이익에 배반(背反)되는 문학예술에 대하여 강력한 타격(打擊)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북한 문학평론의 기준(基準)을 보면, ①해당 작품이 당의 시책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 찬양하고 있으며, 대중에게 얼마나 당적 영향을 미칠 것인가? ②소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창작방법의 원칙이 철저히 구현되었는가? ③당성, 인민성, 계급성 원칙이 얼마나 관철했는가? 등이다.
그들에게 있어 문학예술의 기교(技巧)와 형상(形象)의 문제는 부차적이다. 문학 자체의 내용보다도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당의 지시에 대한 해설(解說)과 그를 관철해야 한다는 요구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문학평론이라기보다 정치 문제에 대한 논문(論文)과 같은 인상이 짙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문학평론은 문학 발전의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정치적 성향만을 강요하여 문학을 파괴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아쉽게도 북한에는 진정한 문인이 없고 따라서 문학평론가도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주장하는 문학예술에서 당성이란, 즉 당에 복종하는 충실한 목적의식이 문학예술 활동에 반영이 된 것을 뜻하고, 인민성이란, 즉 문학예술이 공산주의 혁명과 이해관계를 일치하게 가지는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고 반영하여 그들로 하여금 공산주의적인 것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해석과 결론을 내려 사상과 성격을 관철시키는 것을 뜻하며, 그리고 계급성이란, 즉 문학예술은 예외 없이 계급적 성격을 띠며, 자기[공산주의]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사상적 무기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문학작품이라고 것은 이미 당문학에 길들여져 아주 고질적으로 패쇄된 문학적 관습과 그 매너리즘에 갇혀 문학의 본질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통일이후, 한국 현대문학에서 당문학을 포용하기엔 아주 버거운 존재가 될 것이다. 그것을 문학이라는 범주에 어떻게 접목시켜야 할지가 커다란 명제로 등장할 것이다.
한국 경제와 사회구조는 심각한 중병에 앓고 있다. 사회 전체가 우리 문화와 전통과 뿌리를 부정하며 우리의 정서와 전혀 맞지 않는, 외국의 다국적 문화의 홍수에 밀려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석유위기(oil crisis) 역시 심각하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는 하루 210만 배럴을 소비하는 세계 6위 에너지 소비국이자 세계 4위 에너지 수입국이다. 서민생활을 옥죄고 있는 에너지 위기는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환경보전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하지만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흔적은 어느 구석에도 보이지 않는다. 산업, 환경, 국민 소비 형태를 하나로 묶어 에너지 효율적 체제로 만드는 패러다임(paradigm)의 변화가 필요한 때다. 비장한 각오로 힘을 모아야 한다. 뼈를 깎는 자성과 개혁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모순 속에 살고 있다. 직장이 없어 그냥 하릴없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우리 주변에는 자식이 없는 노인들,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은 어린이들, 길 거리를 헤매는 부랑자들이 많다. 때론 악의와 불신의 검은 구름이 이 사회를 덮고 있다는 암담한 느낌이다. 불신으로 가득 차 매사를 믿지 않고 음모론적 시각으로, 모든 것이 투명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고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의혹이 생겨나고 불신이 만연하며 적의가 발동하는 것이다.
자연을 알면 알수록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깊어지는 법이다. 우리의 생존은 자연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자연을 가꾸어야 하며 그 속에서 우리의 존재를 인식하여야 할 시기가 아닌가. 경제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자연파괴는 사회정의뿐 아니라 생태정의라는 차원에도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이 된다. 미국의 과학 잡지인<디스커버리 : 2000년 10월호>는 매우 절망적인 기사를 실었다. 현재 인류가 멸망하게 될 가능성을 화석시대에 비해 1만 배 이상 증가했다며 2020년 안에 일어날 수 있는 재앙을 20개를 소개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 예언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지만, 왠지 비감이 앞선다. 수십m 규모의 소행성은 300년, 수백m급은 25만년, 10km이상은 3,000년에 한번 꼴로 지구에 충돌한다고 추정한다. 먼 우주에서 엄청난 에너지는 두 별이 하나로 융합할 때, 가까운 곳에서 감마선 폭발이 일어나면 곧 오존층이 파괴된다는 것이다. 오존층이 사라진다면 태양 자외선이 지구 표면까지 닿아 피부암을 일으키고 바다 플랑크톤을 말려 버린다. 실로 절망이 아닐 수 없다. 돌연변이 블랙홀이 지구 옆에 다가와 태양계 모든 행성의 궤도를 뒤죽박죽으로 만든다고 상상한다면 아찔하다. 지구는 태양계 밖으로 튕겨나가 깊은 우주에서 얼음덩어리로 변할지 모른다. 지구는 하나의 커다란 자석이다. 그런데 지구자기장은 지난 세기에 비해 그 세력이 5%나 줄었다고 한다. 자기장이 없으면 태양으로부터 오는 고에너지 입자와 먼 우주에서 오는 고에너지 입자에 대한 보호막이 사라지는 셈이다. 자기장 역전은 심각한 생태계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렇듯이 자연이 죽어가고 있다. 인간은 자연파괴범으로, 자신들의 젖줄인 자연을 훼손시키므로 자멸의 길에 접어들었다. 축산오수 및 분뇨 등 불법 배출로 상수원을 오염시켜 생존권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남의 나라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소름끼칠 정도로 송두리째 갉아먹는 각종 마약류가 국내에서도 위험수위로 치닫고 있다. 그 종류만도 ‘백색의 공포’ 히로뽕과 헤로인, 코카인, 대마 등 전통마약에 그치지 않고 일부 테크노바에서 암암리에 거래돼 술에 타 마신다는 ‘엑스터시’(일명 도리도리)와 히로뽕, 카페인 등을 합성해 만든 ‘야바’ 등 알약형태의 마약, 염산 날부린(누바인) 등 앰플 형태의 마약 등 실로 다양하게 인간 정신의 황폐를 자초하고 있지 않는가. 후세에 있을 미래가 어둡게 느껴질 뿐이다. 이러한 미래의 불안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에서, 문학이 인간적인 삶과 인간적인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현대문학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문학, 넓은 의미에서 예술은 실생활에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플라톤 이래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왔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실생활에 있어서 전설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파스칼은 ‘인간은 천사도 아니며 짐승도 아니다. 더구나 불행한 것은, 사람은 천사처럼 행동을 바라면서 짐승처럼 행동한다.’고 했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신과 악마가 싸우고 있다. 그 싸움터야말로 인간의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의 내부에는 어둡고 보기 흉한 것이 숨어 있는 것일까. 이런 사악함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일본 평론가 나카노 요시오(中野好夫)는 그의 저서<문학의 상식>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는 수신 도덕 교과서와 같이 충신(忠臣), 효자, 동정녀(童貞女) 등의 모범적인 인물의 언행이나 전기(傳記) 같은 것을 읽게 하는 방법, 이것은 의외로 효과가 없다. 두 번째는 마음속의 악의 가능성을 문학이나 또다른 예술로서 정화시키며 조화를 이루며, 삶에의 신선함을 되찾는 방법이다.’라고 했듯이 문학은 인간을 구원한다.
이론가 웰렉은 비평을 외재적(extrinsic) 비평과 내재적(intrinsic) 비평으로 구분했다. 즉, 모방론, 효용론, 표현론은 전자에 속하고 존재론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생활이나 우주 만상, 독자에의 영향, 작가의 정신 등은 모두 문학작품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의미의 가치 있는 구조는 문학작품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쩌든 비평의 중요한 과제는 그러한 외재적 요소와 내재적 구조 사이의 끊을 수 없는 관연성을, 문학작품을 손상함이 없이 어떻게 규정하고 서술하고 평가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기 위해서 비평가는 문학작품 자체에 대한 면밀하고도 편견 없는 관찰로, 그 작품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잘못된 비평은 인식의 오류나 지적 판단을 호도하여 향후 저급한 작품이 양산될 우려도 없지 않다. 어떠한 비평도 비평의 대상임을 잊어선 안 된다. 솔직히 말해 비평가는 창작하는 작가보다 아주 창의적으로 대단하고 섬세하며 치열한 사람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문학에 있어 주연이 아니고 조연보다 못한 여벌의 존재이다. 말하자면 필요악(必要惡)이다. 악어에 붙어사는 악어새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대단한 존재처럼 보이려는 망상을 즐기는 몽환가가 되어있는 듯하여 때론 인간적인 연민의 정마저 느끼게 한다.
우리 주변에 시인도 많고 시집도 많다. 시집 가운데는 참으로 정갈한 언어로 영혼을 맑게 푸르게 하는 시들도 더러 있지만, 거개가 수준이하의 저급한 시[시가 아닌 시]가 어지럽게 널려있지 않는가. 다다익선(多多益善)인가. 동시대에 호흡하는 시인으로서 난감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시집 말미에서 「작품해설」을 만나면 더 큰 혼란이 온다. 온통 과장된 호평(好評). 저질해설을 쓴 문학평론가나 시인은 차라리 문인임을 사양하고서 광고 따위의 문안이나 쓰는 카피라이터(copywriter)임을 자처하는 것이 더 떳떳하지 않을까. 정녕 비감이다. 낙서에 불과한 글과 낡은 잣대[이론]가 버젓이 야합공생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문단의 현주소인가. 비평의 과제는 현실에 안주가 아니라 현실의 모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발언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문학과 토양과 삶 전체를 동시에 고양시키는 것이다. 날카로움과 뜨거움이 없이 평온한 침묵으로 일관된 관성화(慣性化)나 굳은 타성화(楕性化)된 비평은 바람직한 비평자세가 아니다. 문학도 권력(權力)인가. 한국문단의 병폐(病弊)가 바로 이런 것인가. 그리고 한국문단은 집단의 구성원인 문인 개개인의 뜻이 다수결로 반영되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고, 폐쇄적인 정관에 의하여 비민주적 소수 또는 개인의 명분과 실리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는 것인가를…….
한국문단은 기필코 변혁되어야 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낡은 사상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관성화된 매너리즘을 거부해야 한다. 일종의 조직 같은 계보(系譜), 그 문학권력에서 일탈해야 한다. 이를 극복하고 진정한 문학적 지평을 여는데, 새롭고 젊은 사상이 선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야만 한다. 문학의 변혁을 위해 반문학과 혼돈을 벗기고 새로이 숨을 쉬는 작품의 무한성을 추구하고 조명함으로써 보다 새로운 미학, 새로운 문예사조를 맞이하는 희열을 맛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무릇 예술은 그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표현양식이다. 여러 가지 예술 중에도 언어와 문자를 매개로 하는 문학은 예술 중에 예술이다. 예술을 대표하는 정신표출의 한 방식인 문학은 인간의 상상력을 언어 매체인 문자로 형상화함으로써, 픽션과 가정(假定)일 수 있다. 그러나 그 픽션과 가정은 사실적 논리나 과학적 실증을 넘어선 곳에 설정되는 우주적 공간이 되어 줌으로써 과학적 논리를 초월하게 된다. 그래서 문학이 공식과 논리를 초월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소이(所以)를 갖게 된다.
문학의 역할이 인간적인 삶, 인간적인 이상, 인간적인 꿈, 인간적인 가치추구를 실현시켜주는 방식이 되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학이 인간의 정신적 삶을 충족시켜주고 정신적 위안이 되어 주며, 정신적 추구지향을 실현시켜주는 간접적인 수단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현대는 지나치게 물신(物神)주의에 빠져 있다. 인간존엄의 상실도 비극이고 정신의 황폐성도 비극이다. 가치기준이 물질에 의해 설정되는 비극적 물신시대에 문학도 뿌리가 썩어가고 모두가 상업주의에 빠져 탁류에 허덕이고 있다. 사회 전반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듯이, 현대문학의 사조는 혼란이 극에 달해 있다. 이는 특정적 문예지나 특정적 문단뿐 아니라, 소위 문인이라고 자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퇴폐를 조장하는 듯한 매체, 특히 문예지는 지금껏 스스로 택한 비정상적인 신인 방법을 개선하여야 하며 단순한 문학작품의 발표창구가 아니고 문학적 구도(求道)인 인간적인 삶과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진정한 구원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물신주의에 젖어 있거나 문학적 가치가 없는 작품은 철저히 배척하는 것에 더 이상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창작을 하는 문인은 정신적 가치추구를 실현시켜주는 문학의 세계에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진정한 이치를 사유(事由)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산란치 않게 하는 구도적인 자세로 먹을 갈아야 하며, 양보다 질에서 정신적 교감을 나누어야 할 것이고, 그런 속에서 인간존엄의 사양화(斜陽化)에 대한, 보다 냉혹한 자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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